오늘 하루를 위하여
시드니 로렌스
오늘은 2006년 12월 26일, Boxing Day이며 차남 토마스의 23회 생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아내와 단 둘이서 조용한 휴가를 보내기 위해 떠나는 날이다. 나는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쌓인 선물 꾸러미들을 개봉해 보지 않고, 이십여 명의 청년들이 참석할 예정이라는 토마스의 생일파티 준비를 꼼꼼히 챙겨주지도 않고, 도망치듯이 서둘러 Pacific Highway로 차를 몰았다. 싱그러운 녹음과 드높은 하늘이 금방 두 눈에서 가슴으로 진하게 전해졌다. 아!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쾌함인가?
2007년 1월 17일은 우리부부의 은혼기념일이다. 당초 Tasmania로 여행을 계획했으나 성수기의 턱없이 비싼 여행경비가 부담스러워, 가까운 곳에서 독서하고, 묵상하며 휴가를 보내기로 작정했다. 25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살아오며, 아내와 나는 단둘이 오붓한 휴가를 보낸 적이 없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이 살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 휴가에 각별한 의미를 느끼고, 이러한 휴가를 떠나는 오늘이 더욱 특별한 날로 여겨진다.
나는 도박중독자(Compulsive Gambler)이다. 도박중독, 이 질병은 완치될 수 없고 다만 억제할 수 있는 정신병이다. 그래서 나는 최근 7년 6개월 동안 단 한번의 도박이나 오락성 내기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도박중독자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내가 수십 년 동안 강박관념과 충동에 의해 병적으로 도박에 탐닉해 있었으니, 그 동안 나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으며 그로 인하여 가족과 주변에 얼마나 큰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었겠는가? 수십 년간 도박을 하며 내가 끝까지 버리지 못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대박에 대한 미련과 환상이었다. 그 대박이 터지는 날, 나는 과거에 잃어버린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되찾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도박에 몰두했다. 때때로 정신이 들 때면, 도박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이제 다시는 그리고 영원히 도박을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수 없이 많았던 결심과 맹세는 단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참담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의 전 재산과 내가 변통할 수 있는 마지막 금전까지 도박으로 탕진하고, 이제 더 이상 도박자금을 마련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이미 나는 경제적 파탄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귀중한 시간, 재능과 기회, 양심과 영혼까지 도박에 올인하고 껍데기만 남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더 이상 추락할 수도 없는 바닥에 떨어졌음을 깨닫게 되었고,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았다. ‘단도박 친목모임’은 도박중독자들의 자조모임이다. 나는 거기에서 내 운명을 바꾸는 새로운 길을 찾았고, 귀중한 ‘오늘,의 의미를 배웠다. 도박을 영원히 끊으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오늘 하루만 도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병적인 도박중독자이기 때문에 단번에 완전히 도박을 끊을 수는 없고, 하루하루를 하느님께 의지하여 도박 재발을 억제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 단도박을 시작할 때에는 하루 24시간을 아주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보냈다. 우선 도박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불쑥 찾아 드는 도박충동을 가라앉히는 일에 집중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아내와 손을 마주잡고 함께 기도했다. ‘주님, 오늘 하루 도박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달력에다 단도박 경과일수를 써 넣었다. 단도박 부작용인 무기력증과 허탈감으로 고통스러울 때에는 수시로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를 반복했다. ‘주님,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도 주소서’ 라는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는 하루하루 단도박에 총력을 기울이는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주님, 오늘 하루 단도박할 수 있도록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달력에 표시되어 있는 단도박 경과일수에 동그라미를 그어 단도박 경과일수를 최종 확인하고 하루 일과를 마감하였다.
도박에 빠져 세월의 흐름마저 제대로 느끼지 못하던 시절, 나에게 ‘오늘’은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우선 헝클어져 널려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직시하기 두려웠고, 나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바라보고 인정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과거로 돌아가 나 자신을 학대하거나, 아니면 비현실적인 아름답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오늘’로부터 도피하였다. 그러나 단도박하며 새로이 맞이하는 ‘오늘’은 얼마나 길고, 소중하고, 아름다운가? 오늘 하루만 도박하지 않으면 되고, 오늘 하루만 아내에게 화 안 내고, 오늘 하루만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것이다. 그저 쉽고 단순하게 느껴져 힘과 용기가 솟는다. ‘오늘’이 지니고 있는 무게는 얼마일까? 태고로부터 이어 온 과거의 무게와 영원으로 이어지는 미래의 무게를 합친 것보다 분명 클 것이다. 왜냐하면 지나간 과거의 시간은 오늘을 위한 전주곡이고, 다가올 미래의 시간은 결국 오늘 하루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부부를 태운 자동차는 Hawkesbury 강을 건너고 있다. 마침 만조라서 짙푸른 Mangrove 나무의 가슴까지 파란 물결이 넘실댄다. 옆에 앉아 상념에 잠겨있는 베로니카의 환한 얼굴에 잔잔한 미소까지 감돈다. 이심전심일까? 문득 그 분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내 가슴에 울려 퍼진다. ‘하늘에 ……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아멘.’
출처 - http://cafe.daum.net/atlantakoreanga/AFOn/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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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에 쓴 글입니다. 도박 중독으로 고통 속에 계신 분이나 가족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