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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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2 (21:07:38)
 

< 길의 시작 >


   하늘은 깊고, 온 산은 가을 옷을 입었다.

떨어지는 낙엽이 갈 곳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28년 전, 이맘 때 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인생의 의미를 처음으로 생각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경제적 문화적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했던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용기가 있어 보이는 청년을 만났다.

  그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한 열정으로 내면의 허기를 덮고 있었다.

 첫 돌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님의 극진한 사랑과 기대 속에 자란 그에겐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가 너무 깊어 현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황하는 그를 사랑으로 세우리라는 마음으로, 집안 어른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1983년 겨울, 서울의 한 교회에서 용감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의 지난(至難)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 길고 어두운 터널 >


  경기도 의정부에 월세 방을 얻었다.

외박하는 날이 종종 있었고, 월급도 일정하게 주지 않았지만, 직장이 멀고 술과 친구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내가 직장관계상 남편의 퇴근시간에 집에 없을 때가 종종 있으므로 의심하지 않았다.

  보험회사에 다니던 남편이 직장을 그만 두고, 대기업에 입사했고, 오래지 않아 또 직장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공백 기간을 가지다가 다시 정부투자 건설기관에 입사했다. 머리가 명석하고 사교적이었던 남편은 취직도 잘했고, 열성적으로 일했기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든 오래있지 못했고, 돈을 가져다주지도 않았다. 


 내가 직장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에 생활비는 문제되지 않았고, 경제관이 희박했던 나는 남편에게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끔 남편에게 알지 못할 허전함 같은 것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내가 채워줄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고민했다.


  1985년 아들을 낳았고, 결혼 후 3년, 직장생활 5년 이상 지났지만 목돈으로 모아진 것이 없었다. 남편이 원할 때 적금마저 해약해서 줬던 것이다.

  남편은 자주 우울해 보였으며, 바람처럼 나갔다가 귀가하는 날이 많았고,  그때서야 남편이 도박하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은 아들 돌, 백일 반지 모아놓은 것까지 들고 나갔다.

집에 있는 저녁보다, 나가는 날이 많았으며, 아주 오랜만에 장모님이 오셨는데도 아랑 곳 없었다. 한번은 어느 호텔에서 한다는 것을 알고 무조건 찾아간 적도 있었다. 바람이 매서운 겨울밤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물어볼 곳도 없었다. 어두운 바다에 홀로 빠져,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스스로 괴로워하며, 계속 도박중독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도박의 폐해를 알면서도 막지 않고, 또 막지 못하는 정부와 경찰이 원망스러웠다. 커다란 바위 앞에 마주선 것처럼 막막하고 절망적이었다.

직장에서도, 친구에게도, 친척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울었다.

울고 울다, 시간이 되면 직장에 가고, 아이를 키우고, 교회에 나갔다.


  큰 아이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게임에 빠져 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잦았다. 남편을 많이 닮은 아들은 남편이 도박으로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학교에 가지 않고 오락실이나 만화방에 갔다. 그럴 때는 남편에게 난 화까지 아들에게 퍼부었다.

  남편의 도박을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혼자 다 감당하는 줄 알았는데, 아이들도 모든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불안한 부모 밑에서, 더 불안했던 아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수업일수를 겨우 채우고 졸업했으며,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쳐야했다. 늘 문제를 만들었던 남편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많이 가지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는 저녁 늦게 전화가 왔다.

‘사랑했다. 미안하다.  혼자서 잘 살아라’ 이런 내용의 전화였다.

너무 당황스럽고 불안해서 울면서 목사님께 전화를 했고, 전화한 장소가 진해의 장백산 근처라는 것을 알고 한밤중에 목사님과 함께 장백산을 허메고 다녔다. 살아만 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새벽녘까지 찾아 다녔다.


  도박중독에 대해 무지하던 시절,

“내가 이렇게 그를 사랑하는데, 그리고 가족 모두 건강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데, 왜 그는 힘들어하는 것일까?”

“왜 죽음을 생각할 만큼 괴로운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직장생활에서 다소간 모아지는 목돈은 물론, 시어머님, 시누이, 친구에게까지 신세를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직장도, 자영업도 오래하지 못했으며, 계속되는 여러 종류의 도박으로 몸과 마음이 더욱 황폐해져 갔다.


  조합아파트 분양권을 이중으로 매매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배임죄로 구속되었다. 그것도 내 고등학교 친구와 관련된 일로 나의 입장도 난처하게 되었으며, 내가 아는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액수였기 때문에 구속되지 않도록 조처를 취할 수도 없었다.

교도소에서 남편은 성경책을 여러 번 읽으며 1년여의 수감생활을 잘 견뎌냈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성경말씀으로 서로 위로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직장생활을 유지하며 자녀를 양육하고, 시어머님이나 친정에도 알리지 않았다.  물론 친척들의 대소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 슬픔을 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니, 늘 마음이 무겁고 어두웠다.

어쩌면 가면을 쓰고 사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내겐 하나님과 직장이 있었으므로 하루하루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남편도 열심히 살고자 노력했다.

농장에서 일군으로, 하루하루 팔려 가는 막노동으로, 구두닦이로, 양어장에서, 양돈장에서, 짜장면 배달로, 회사 외판원으로...  어떤 일을 해도 쉽게 적응했고, 정열적으로 했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어떤 일도 오래 하지 못했다.  그 때마다 도박으로 인한 고통이 있었는데, 도박 때문에 일을 중단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일을 중단하게 되어 도박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점점 진행된 이 병은 가정을 황폐화 시켜갔다.

남편은 나의 카드나 돈을 몰래 가져가기도 하기 때문에 늘 지갑을 숨겨야 했다. 어느 날은 지갑을 베개 밑에 숨기고 누워 있는데, 잠든 줄 알고 베개 밑에 손을 넣어 찾고 있었다.

‘아, 정상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기도했다. 내가 어떤 희생을 해서라도 남편이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리라 마음먹었다.

안정된 직장이었지만, “내가 직장을 그만 둔다면 가능할까?”

“남편과 같이 포장마차라도 한다면 남편이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차라리 함께 밑바닥 생활을 한다면......”

그러나 확신이 없었다. 남편의 상태를 어느 정도 눈치 챈 친정에서는 계속 직장생활 할 것을 권유했다.  또 나와 남편 둘 만이라면, 굶어도 같이 굶으면 되지만 아직 자라야 할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직장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직장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외박하고 연락이 안 되는 날, 남편이 경찰이나 교도소에 있는 날, 또 출근한 아침 직장으로 전화해서 “사고가 생겼다”“급하게 돈 천 만원 부쳐라”“죽겠다. 아이들하고 잘 살아라”...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했지만 마음은 늘 불안하고 답답했다.


  한 때는 사채업자들이 밤낮 없이 찾아왔다.

사택에 사는데, 새벽 1시, 3시, 4시 이런 시간에 찾아와 소리를 질러댔다.

주변 직장동료들한테 부끄럽고, 아이들에게도 상처가 될까봐 두려웠다.

전화로도 협박을 했다.


  이제는 돈을 해 줄 능력도 없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야겠다는 내게 남편은 

“함께 죽어야겠다”

“가스 줄을 끊어서 함께 죽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했다”는 말을 했다.

이렇게 말하는 남편의 얼굴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무서웠다.

아이들을 데리고 구역식구 집에 피신했다.

“어떻게 아이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한 바탕의 소용돌이가 끝나고,

남편은 “찾지 마라” “아이들하고 살고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으며, 남편이 떠난 다음에도 사채업자들은 계속 찾아왔다.

문 밖에서 위협적인 언사로 떠드니, 대꾸할 수도 없고 문을 열 수도 없었다. 너무 두렵고 무서워, 경찰에 부탁하니 그 위협하는 말을 녹음하라고 했다. 녹음도 하고, 파출소에 신고도 하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의 신변이 염려되어 학교에 찾아가서 담임선생님께 사실을 얘기하고, 학교에서의 안전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런 일 후에 남편은 서울 친구에게 얼마간의 급한 빚을 갚겠다고 돈을 빌려왔다. 그러나 남편은 빚을 갚지 않고 그 돈으로 또 도박을 했다.


  한번은 일하는 데 필요하다고 하며 나의 인감증명을 요구했다.

또 얼마간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인감증명’을 떼어서 용도 란에 ‘회사 제출용’이라고 써서 줬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은, 남편이 다시 나를 보증인으로 세우고 사채 천 오백만 원을 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봉급압류가 들어올 때는 삼천 오백만 원으로 되어 있었다.


  남편은 이미 신용불량이 되어 있었으므로 일을 하면서 내 카드와 통장을 사용했는데, 카드도 사용한도까지, 그리고 통장도 마이너스 한도까지, 그동안 내가 은행권에서 빌려준 돈을 합치니 내 몫의 부채만도 1억 가까이 되었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2002년 남편친구는 이혼해줄 것을 남편에게 조언했고, 우리는 서류상으로 이혼을 했다. 결혼 19년째였다.


 남편은 서울로 피신해 자장면 배달을 하고, 나는 부산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며, 도박중독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부하고, 이곳저곳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2002년 4월부터 단도박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남편은 단도박 모임과 연수에 한 번씩만 참석하고, 사채업자들을 피해 서울로 가게 되어, 부산에서 9개월 동안 혼자 단도박 모임에 참석하며 중독에 대해 공부했다.


 남편이 서울에서 내려올 때는 서류상 재결합을 제안하며, 두 가지 지켜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것은 신앙생활과 GA생활을 꾸준히 함께 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 때는 많이 당황스럽고, 무서웠던 일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서울로 피신해서 짜장면 배달을 하던 남편이 내려올 때, 재결합 기념으로 친정동생이 살고 있는 제주도로 여행을 계획했다. 신혼여행도 못 갔으니, 남편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고, 제주도도 처음이었다. 갈 때는 남편은 김포공항에서 가고, 나는 부산에서 갔다가 올 때는 함께 부산행 비행기표를 샀다.

  그런데, 제주공항 검색대에서 그만 ‘지명수배자’로 검색되어, 나는 혼자 비행기를 타고 오고, 남편은 경찰에 연행되어 배로 부산에 있는 경찰서로 오게 되었다. 그래도 김포공항에서는 검색되지 않고 제주에서 올 때 걸려서 2박3일 제주 여행은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역시 도박으로 인한 빚 때문이었다.


 < 쉽지 않은 등산 길 >


   2002년부터 단도박을 시작하였으며, 2주년 잔치 후 재발, 다시 3주년 잔치 후 재발, 그 후로도 한 번 더 재발하고, 이제 단도박 2년 남짓 지났다.


  도박중독에 대해 알아가는 9년 동안 네 번의 재발이 있었고, 지금도 남편은 알코올에 의존하고 운동에 몰입하며 생활하지만 요즈음은 평안과 감사의 생활이다.

  도박중독자 가족으로서 수기 응모를 제안 받았을 때, “내가?, 지금 나는 평안한데, 그 지독했던 터널의 시절을 생생히 적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아름다운 길, 중독자와 그 가족만이 걸을 수 있는 이 길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에 응모했던 수기를 꺼내 보며 다시금 어떻게든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단도박도 어렵지만, 중독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가족병에 시달리던 사람이 평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오랜 동안 유지해 오던 생활패턴을 바꾸는 것이 어려웠다.

  남편은 기분변화가 심하고, 자신과 자녀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메시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남편이 우울해 하거나, 비난할 때는 나도 바로 답답해지고, 걱정과 불안으로 위축되기 일수였으나, 이제는 달라졌다.

 중독증에 대해 공부하고, 중독관련 전문기관의 워크숍에 참석하고, 일기를 쓰고, 중독자가족들을 도우면서 또한 도움을 얻었다.


  재발을 했을 때도, 밤늦게까지 연락이 안 될 때도, 예배를 빠트리거나 GA모임에 나가지 않아도, 우울모드에 빠지거나 기분변화가 심할 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은 기도하며 맡긴다.


  먼저 나 자신을 인정하고 수용하므로 위축되지 않는다. 나는 완벽한 아내이기를 고집하지 않고, 남편의 비난에 대해서도 평등한 부부관계로서의 자세로 임했다.


 청소, 빨래, 밥짓기 등 집안일도 혼자하려 하지 않는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하고, 힘들 때는 그냥 방치하거나, 남편과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지혜도 배웠다. 혼자 하려하는 것보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냥 방치하므로 가족으로서 남편과 아들도 가정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었다.


  가정을 먼저 생각하고, 나를 돌보지 않던 생활에서 나의 감정과 욕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생활로 바꿨다. 매일 퇴근하면서 수영을 하고 주말에는 테니스를 친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나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 기꺼이 함께 하지만, 남편이나 자녀가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나를 먼저 존중하고, 가족을 똑같이 존중하므로, 평안과 사랑이 흐른다.

 아들이 자존감이 낮고, 우울정서가 심해서 심리치료를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나의 변화로 가정이 안정되니, 아들도 많이 안정되고, 정체감을 형성해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아들에게도 그동안 부모로서 잘못했던 것들은 잘못했다고 말하고 용서를 구했다.


   가진 것은 여전히 없다.

아직 월세에 살고 있고, 보증금을 조금씩 늘려나가고 있다.

작은 아파트지만 주변에 커다란 정원을 여럿 소유하고 맘껏 누리고 있다.

아파트 옆에 있는 학교 교정, 5분 거리의 갑천과 여러 도시공원들이 다 내가 가꾸지 않고도 언제든지 자유로이 누릴 수 있는 정원이다.

이런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여유를 얻게 된 것은 도박중독자 가족으로서 겪은 아픈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힘든 등반을 하고 산에 오른 경험이 소중하듯이 어려운 과정을 통해 힘을 얻었다. 또한 함께 등반하는 따뜻한 동행이 있으니 얼마나 멋진 여정인가?


  < 함께 가는 길 1 >


  GA모임에서 만난 도박중독자 선생님들을 생각해보면, 정말 따뜻한 사람들이다.

중독이라는 질병으로 힘들고 지친 삶을 살지만, 순수하고 정 많은 사람들이다.

 차가 없을 때에는 항상 집 앞까지 태워다주고, 사채업자들이 괴롭힐 때는 언제든지 달려와 주었다.

  직장생활로 시간이 없는 것을 안 여사님은 김장을 해다 주었으며, 카페에 올린 글이 어두우면 전화해서 맛난 밥을 사주었다.

  고기를 잡으며 횟집을 하는 선생님은 직접 잡은 전어를 썰어오셨고, 상황버섯을 재배하는 선생님은 2년 이상 상황버섯 물을 모임 때마다 가져오셨다.

 미용실을 하는 여사님은 언제나 싼 가격에 멋지게 머리 손질을 해주며,‘이것도 봉사여!’ 하신다.

  도박으로 살림은 넉넉지 못하지만 우리는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아픔을 알고, 가진 것 적지만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길은 힘이 난다.


   이 길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어서 애쓰시는 신부님도 만났고, 선교사님도 안다.

진정으로 중독자와 가족의 편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고 싶어하는 상담사도 만났다. 힘에 겨우면 전화를 하고 인터넷으로도 나의 힘듦을 알린다.

  땀 범벅되어 오르는 등산 길에 한 줄기 바람 같은 분들!

이 또한 인생의 아름다운 도전으로 다가온다.


  지독한 중독병과 가족병으로부터 회복을 향해 가는 길은 함께 가는 길이다.

회복을 위해 애쓰는 모임의 사람들과 함께 가는 길이며, 또한 우리를 돕고자 하는 전문기관의 상담사, 신부님, 선교사님들과 함께 가는 길이다.

 

 

< 함께 가는 길 2 >


  진정한 자유와 평안은 여기에서 왔다.

위대한 힘(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 말이다.

오래 전에 중독자와 가족에게 소개된 12단계 회복프로그램은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먼저, 도박중독과 그로 인해 파생된 문제에 대해 나는 무력하다.

남편의 알콜 의존과 운동 몰입에 대해 나는 무력하다.

남편의 기분변화에 대해 나는 무력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며, 나를 돕고 싶어하신다.

나는 나의 의지와 염려를 다 맡기고 자유롭게 기뻐하면 된다.


  전에는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며 염려했었다.

남편이 우울해하거나 불안정하면 나도 함께 기분이 변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상황을 뛰어넘는 평안과 자유를 느낀다.

이상한 것은 내가 남편의 기분을 함께 느낄 때보다, 내가 먼저 자유와 평안을 누리면 남편도 쉽게 안정되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과 어쩔 수 있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 즉 나 자신의 변화만을 위해 노력한다.

  

  나의 변화, 나의 길을 가기 위해 날마다 새벽기도를 한다.

그 길은 나를 먼저 사랑하고, 똑같이 남편을 사랑하는 길이다.

그 길은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가는 길이고, 참 자유와 평안의 길이다.

도박 중독! 그 지독한 병이 그 길로 나를 안내했다.

그 분과 함께 가는 참 아름다운 길로.


2011.12.22 (22:33:11)
토니

채송화님 글을 읽으면서 미안함과 죄스러움으로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같은 중독자로서 같은 행동을 하며 아내와 가족을 절망에 빠뜨렸던 저의 잘못을 다시금 반성하게됩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될 일이라고 다짐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 잘 이겨내시고 함께하시는 용기와 가족을 지키신 지혜와 결단에 찬사와 감사를 드립니다.  자매님의 고통을 오늘에야 자세히 알게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대화 속에서 짐작은 하였지만, 이렇게 힘들줄은 몰랐었습니다.   함께 나누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탁하자마자 이렇게 바로 나누어주심에 무어라 기쁨을 전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도박중독자의 가족과 중독자분들께서 자매님의 체험담이 치유와 회복을 위한 씨가 되고 교본이 되어, 정상적이고 행복한 평안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자매님의 가정위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은혜가 늘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더 큰 지혜와 총명으로 많은 사람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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